Contents
1. 세례 관련 Q&A
세례의 시작은?
세례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레위기 15:13 “유출병이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정결하게 되기
위하여 이레를 센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라.”
민수기 19:17 "부정을 씻는 물을... 그 정한 자가 그 더러운 자에게 뿌리고... 목욕을
하고 나면 저녁에 정하리라."
물은 그 몸을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부정함을 깨끗케 한다고 여겼습니다. 즉, ‘세례’라는 용어로 정의된것은 아니지만, 구약시대부터 이러한 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둘째는 <‘미크베’라는 유대 전통>입니다.
위의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유대인들은 ‘미크베 정결예식’이라는 전통을 만들었는데, 이는 ‘정결탕’이라는 하는 욕탕을 만들고 그곳에 온 몸을 푹 담그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개종할 때에도 필수적으로 행하던 의식이었습니다. 정리하면, 구약시대부터 세례와 같은 기능을 하는 의식들이 있었으며, 이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여기에 더하여 ‘회개’의 개념과 ‘메시야 준비’의 개념을 더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세례를 주는 사람이 되었나?
이 질문은 어떻게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크게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제사장 가문이라는 혈통적 배경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유대인들에게 제사장의 집안은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구약 성경(이사야서)의 예언 성취를 통한 정당성
세례 요한은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즉, 예언서를 알고 있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렇게 외치는 선지자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저 가볍게 간과할만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3.
예언자적이고 구별된 광야의 삶
마지막으로 위의 모든 것을 진실임을 뒷받침한 것은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사는 모습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엘리야 선지자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유대 사회는 당시 약 400여년간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특별한 삶의 모습과 그가 외친 성경의 말씀, 그리고 그의 출신 성분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2. 예수님의 말씀 관련 Q&A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요12:25)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표현 그대로, “죽음”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알리는 본문 가운데 나타난 말씀입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께서 죽으면, 많은 열매, 즉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같은 삶의 태도, 즉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을 감수하는 태도로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란? (요15:8, 16)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열매가 무엇인가는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협소한 정의로 보자면, ‘사람의 영혼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협소한 의미이고, 본문이 말하는 다양한 함의를 품기에는 부족합니다.
15장의 열매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총체적인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사랑의 실천, 순종의 삶, 성령의 열매, 성화의 모습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응답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갑자기 친구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요15:13)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해석을 함께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큰 맥락의 의미는 ‘사랑의 강조’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종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사랑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가 큰 맥락에서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 예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상황이 십자가 수난 바로 이전의 상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보는 관점에 따라, 사랑의 강조와 수난 예언 두 가지 모두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 사함의 권세를 받는다? (요20: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죄 사함의 권세가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막 2:7, 시 130:4). 그러므로 이 본문은 “제자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중보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즉,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를 위한 중보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보하지 않는다면, 죄인인 줄도 모르는 그 누군가는 회개의 기회가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게 될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가톨릭은 이 본문을 고해성사의 근거로 두며, 고해성사를 주관하는 사제가 곧 죄 사함의 주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제가 죄를 사하면 그 사람의 죄가 없어지고, 사제가 그대로 두면 죄도 그대로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