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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의의나무 청년부

푸른통독 Q&A | 사도행전

Contents

1. 바울 관련 Q&A

바울이 머리를 깎은 이유는? (18:18)

이 구절의 구체적인 의미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유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아마도 나실인의 서원일 수도 있고(민수기 6:1-21) 사적인 다른 서원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바울이 옛 유대인들의 관습을 좇아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율법에 따라 서원한 것을 지킨 것은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 즉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주의로 회귀하는 일에 대해서 반대하고 경계했지만, 하나님을 좇는 열심을 그만둔 적이 없습니다. 복음, 십자가를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바울의 서원의 마음입니다. 머리를 깎을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마음에 새기는 할례가 우리에게 필요한 오늘날의 서원입니다.

바울은 굳이 위험한 로마에 가야 했을까?(25:10-11)

마치 누가복음이 예수께서 끊임없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갔음을 기록해놓은 것처럼(눅 9:51, 19:28) 사도행전에서는 바울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땅 끝으로 계속 나아갔음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을 예고했지만(행 20:23) 그럼에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 말하며 예수님처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우리가 2007년에 이미 경험한 아프간 사태로 인해 과격한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이 많이 무너지기도 했고,최근 선교의 패러다임이 조금 더 안전하게 바뀐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성령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것도 결국 ‘성령에 매여’ 간 것입니다.(행 20:22)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고자 함도 결국은 바울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성령께서 감당할 만한 자에게 주의 부르심을 명확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행 23:11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에 매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욕심, 어떠한 공동체나 단체의 사욕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아니라 성령의 부르심을 따르다 보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만한 자에게 기쁨으로 달려갈 길을 보이십니다.

2. 초대교회 관련 Q&A

방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방언은 성경에서 주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사도행전 2장에서처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실제 언어(타언어)로 말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둘째, 고린도전서에서 언급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천사의 말 혹은 영적인 언어)이 있습니다.
방언이 주어진 목적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신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며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방언을 통해 우리의 이성으로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언도 ‘은사’라는 점입니다. 은사는 철저히 공동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방언이 공동체 안에서 사용될 때는 반드시 통역이 동반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하나님께만 말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방언이 나 자신만을 위한 체험이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세우는 데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방언을 사용할 때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되,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를 세우는 데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유두고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20:7-12)

유두고의 이야기는 단순한 해프닝이나 경고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회복과 공동체의 위로라는 두 축 위에서 깊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바울의 밤늦은 설교, 그리고 지친 청년 유두고의 졸음은 어쩌면 우리 일상 속 연약함을 대변합니다. 누구나 피곤할 때가 있고, 아무리 중요한 자리라도 마음과 몸이 먼저 지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짜 감동은,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바울이 곧장 내려가 그를 안았고, “그에게 생명이 있다”고 선언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의 이 행동은 단순한 동정이나 인간적 위로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절망의 자리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회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 회복이 결코 개인적인 체험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은 유두고의 회복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한 사람의 회복, 한 명의 청년이 다시 살아난 그 경험이, 밤을 지새우던 모든 공동체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힘이며,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넘어지고 지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절망을 회복의 계기로 삼으시고, 그 회복의 은혜를 통해 공동체 전체에 위로와 소망을 흘려보내십니다. 누군가의 실패가 내 일이 되고, 누군가의 회복이 나의 기쁨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모습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혼자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회복과 변화는 언제나 누군가의 기도와 위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넘어지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위로받고,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두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3. 기타 Q&A

16장에서 ‘우리’는 누가를 포함하는 건가요?

사도행전 16:10-11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맞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신학용어로 we-section) 누가는 예수님의 직속제자도 아니었고, 심지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지만 성경을 쓰게 된 유일한 이방인 저자라 할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사도행전) 그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쓸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바울과 실라와 다닌 2차 선교여행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이방인의 사도라 불린 바울과 함께 다니며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죠. 그러면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헬라인) 출신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 즉 모든 인류에게 열려있고 이 것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야 했고(누가복음), 다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성령의 행전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열리게 되었음을 전하고 싶었을 겁니다.